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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노 요리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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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지와라노 요리미치는 992년에 태어나 1074년에 사망한 일본 헤이안 시대의 귀족으로, 후지와라 씨의 권력자였다. 그는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장남으로, 1017년에 26세의 젊은 나이로 섭정이 되어 사상 최연소 섭정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요리미치는 섭관정치 시대를 이어받아 여러 천황을 옹립하고 자신의 딸들을 황후로 입궁시켜 외척으로서의 권력을 강화했지만, 자녀가 적어 후지와라 씨의 권력 세습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뵤도인을 건립하는 등 문화적 업적도 남겼으며, 장원 정리령을 실시했지만 실패하여 율령 체제의 붕괴를 가속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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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노 요리미치 - [인물]에 관한 문서

2. 생애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좌대신 미나모토노 마사노부의 딸 린시이다. 998년 동전상, 1003년 12세에 내대신 후지와라노 키미스에의 가관으로 원복을 하고 요리미치라는 이름을 받았다. 종5위하에 서임되었으며,[1] 1006년, 15세에 종3위에 서임되어 공경 반열에 들었다.[1] 1013년권대납언에 임명되었다.[1]

무라카미 천황의 일곱째 황자인 토모히라 친왕의 딸 타카히메 여왕을 부인으로 맞이하였다.[2]

1016년, 산조 천황고이치조 천황에게 양위하자 외조부 미치나가가 섭정이 되었다.[3] 1017년 요리미치는 내대신으로 승진함과 동시에, 아버지를 대신하여 섭정 선하를 받고 후지와라 씨 장자도 물려받았다.[3] 26세의 젊은 나이로, 당시 최연소 섭정이었다.[3] 같은 해 말에는 태정대신으로 승진하면서 이듬해에 사임한 아버지는 전 섭정으로서 젊은 요리미치를 후견하여 후계 체제를 굳혔다.[3] 1019년 관백이 되고, 1021년좌대신으로 전임되었다.[4]

1028년 간토에서 다이라노 타다쓰네의 난이 일어났고, 이 난을 진압하는 데 3년이 걸렸다. 난의 주전장이었던 보소 지방은 황폐해졌다. 이 난을 진압한 것은 미나모토노 요리노부였으며, 이를 계기로 세이와 겐지가 간토에 세력을 가지게 되어 무사가 본격적으로 표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1036년 고이치조 천황의 사망으로, 동모제인 고스자쿠 천황이 즉위했음에도 불구하고, 요리미치는 계속 천황의 외숙부로서 관백을 맡아 조정의 권세를 집중시켰다. 그러나 자녀를 얻지 못한 요리미치는, 겐시를 양녀로 고스자쿠 천황에게 입내시켜 황후(중궁)로 삼았다.

1045년, 고스자쿠 천황은 후지와라 씨를 외척으로 두지 않은 손히토 친왕을 황태자로 책립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했다. 친히토가 즉위하고 손히토가 황태자로 세워졌으나, 요리미치는 후지와라 씨와의 인연이 옅은 손히토에게 협력하지 않았다.[3] 1050년에는 외동딸 칸시를 고레이제이 천황에게 입내시켜 황후로 삼았지만, 황자를 얻지 못했다.

1051년, 무츠노쿠니에서 젠쿠넨의 역이 발발한다. 요리미치의 권세는 표면적으로 쇠퇴하지 않고, 1052년에는 뵤도인 호오도를 개수했다. 다만, 이 무렵 장원의 증가로 인해 국가 재정이 위기에 놓였고, 요리미치는 장원 정리령에 착수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권문 옹호책으로 끝났다.

1061년, 70세가 된 요리미치는 태정대신에 임명되었으나, 다음 해에 아버지의 예를 따라 1년도 채 안 되어 사임했다. 1067년에는 관백을 사임하고, 준삼궁을 선하받았다. 후임 관백에는 동모제인 노리미치가 임명되었다.

1068년, 고레이제이 천황이 사망하고 손히토 친왕이 즉위하자, 요리미치는 우지에 은거했다. 고산조 천황은 엔큐의 장원 정리령을 내려 후지와라 씨의 장원도 심사 대상이 되었으나, 요리미치의 장원 핵심인 뵤도인령은 유지되었다.

1072년 출가했고, 같은 해 고산조 천황사다히토 친왕에게 양위했다. 요리미치는 1074년 83세로 사망했고, 셋칸 정치의 전성기는 막을 내리고 인세이의 시대로 옮겨간다.

2. 1. 초기 생애와 권력 승계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좌대신 미나모토노 마사노부의 딸 린시이다. 안나의 변으로 실각한 미나모토노 타카아키라의 딸 아키코의 아들들보다 승진에서 우대받았다.

998년 동전상, 1003년 12세에 내대신 후지와라노 키미스에의 가관으로 원복을 하고 요리미치라는 이름을 받았다. 종5위하에 서임되었다.[1] 1006년, 15세에 종3위에 서임되어 공경 반열에 들었다.[1] 1013년권대납언에 임명되었다.[1]

무라카미 천황의 일곱째 황자인 토모히라 친왕의 딸 타카히메 여왕을 부인으로 맞이하였다.[2] 미치나가는 "남자는 처의 가문이 중요하다"라며 기뻐했다.[2]

산조 천황이 실명 직전의 안질을 앓고 있을 때, 잦은 동궁 아츠나리 친왕(고이치조 천황. 생모는 미치나가의 장녀 쇼시)에게 양위할 것을 강요받아 미치나가와 갈등을 빚었다. 미치나가는 천황에게서도 반발을 받아 양위에 응하지 못했다.[2] 미치나가를 회유하기 위해 요리미치에게 황녀 테이시 내친왕을 하가(下嫁)시켜 달라고 요청한 천황에게 미치나가는 동의했지만, 타카히메만을 사랑하는 요리미치는 이 혼담을 걱정했다.[2] 이에 대해 미치나가는 "남자가 어째서 한 명의 처로 멈추는가. 게다가 자식이 없으니 널리 후사를 구하라"라고 질책하며 억지로 혼인을 강요했지만, 요리미치는 중병에 걸리고 만다.[2] 가지조복의 결과, 토모히라 친왕의 원령이 나타났기 때문에 이 결혼은 없던 일이 되었다고 한다.[2]

1016년, 미치나가의 압력에 굴복한 산조 천황이 아츠나리 친왕에게 양위하자 외조부 미치나가가 섭정이 되었다.[3] 1017년 요리미치는 내대신으로 승진함과 동시에, 아버지를 대신하여 섭정 선하를 받고 후지와라 씨 장자도 물려받았다.[3] 26세의 젊은 나이로, 당시 최연소 섭정이었다.[3] 같은 해 말에는 태정대신으로 승진하면서 이듬해에 사임한 아버지는 전 섭정으로서 젊은 요리미치를 후견하여 후계 체제를 굳혔다.[3] 1019년 관백이 되고, 1021년좌대신으로 전임되었다.[4]

2. 2. 섭관정치 전성기와 한계

미치나가 사후, 요리미치는 자립하여 독자적인 권력 확립에 힘썼다. 1029년에는 태정대신 후지와라노 기미스케가 사망함에 따라 일좌가 되었다.[1][2]

1028년 간토에서 다이라노 타다쓰네의 난이 일어났고, 이 난을 진압하는 데 3년이 걸렸다. 난의 주전장이었던 보소 지방은 황폐해졌다. 이 난을 진압한 것은 미나모토노 요리노부였으며, 이를 계기로 세이와 겐지가 간토에 세력을 가지게 되어 무사가 본격적으로 표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1036년 고이치조 천황의 사망으로, 동모제인 고스자쿠 천황이 즉위했음에도 불구하고, 요리미치는 계속 천황의 외숙부로서 관백을 맡아 조정의 권세를 집중시켰다. 그러나 "일가 삼후"를 실현한 미치나가와 달리, 자녀를 얻지 못한 요리미치는, 아츠야스 친왕의 딸인 겐시를 양녀로 고스자쿠 천황에게 입내시켜 황후(중궁)로 삼았다.

고스자쿠 천황의 비가 된 여동생 키시는, 친히토 친왕을 낳자마자 사망했기 때문에, 손히토 친왕을 낳은 테시 내친왕이 황후로 세워져 있었다. 요리미치가 황자 탄생을 기대했던 겐시는 황녀를 낳았을 뿐 사망했고, 동생 노리미치도 딸 쇼시를 입내시키지만 황자를 낳는 일은 없었다.

1045년, 고스자쿠 천황은 후지와라 씨를 외척으로 두지 않은 손히토 친왕을 황태자로 책립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했다. 이리하여 친히토가 즉위하고 손히토가 황태자로 세워졌으나, 요리미치는 후지와라 씨와의 인연이 옅은 손히토에게 협력하지 않았다.[3] 1050년에는 외동딸 칸시를 고레이제이 천황에게 입내시켜 황후로 삼았지만, 황자를 얻지 못했다.

1051년, 무츠노쿠니에서 젠쿠넨의 역이 발발한다. 요리미치의 권세는 표면적으로 쇠퇴하지 않고, 1052년에는 뵤도인 호오도를 개수했다. 다만, 이 무렵 장원의 증가로 인해 국가 재정이 위기에 놓였고, 요리미치는 장원 정리령에 착수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권문 옹호책으로 끝났다.

1061년, 70세가 된 요리미치는 태정대신에 임명되었으나, 다음 해에 아버지의 예를 따라 1년도 채 안 되어 사임했다. 1067년에는 관백을 사임하고, 준삼궁을 선하받았다. 후임 관백에는 동모제인 노리미치가 임명되었다.

1068년, 고레이제이 천황이 사망하고 손히토 친왕이 즉위하자, 요리미치는 우지에 은거했다. 고산조 천황은 엔큐의 장원 정리령을 내려 후지와라 씨의 장원도 심사 대상이 되었으나, 요리미치의 장원 핵심인 뵤도인령은 유지되었다.

1072년 출가했고, 같은 해 고산조 천황사다히토 친왕에게 양위했다. 요리미치는 1074년 83세로 사망했고, 셋칸 정치의 전성기는 막을 내리고 인세이의 시대로 옮겨간다.

2. 3. 장원 정리령과 실패

요리미치는 국가 재정이 위기에 놓이자 초큐 원년(1040년), 간토쿠 2년(1045년), 텐키 3년(1055년)에 장원 정리령을 실시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권문 세력의 이익을 옹호하는 데 그쳤다. 이는 장원 증가를 억제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을지 몰라도, 율령 체제의 붕괴를 가속화시키고 무사 계급의 등장을 촉진하는 요인이 되었다.

특히 고산조 천황이 엔큐의 장원 정리령을 실시했을 때, 요리미치는 자신의 장원을 지키기 위해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기록소에서 문서 제출을 요구하자 "그런 것은 없으니 모두 몰수해도 상관없다"라고 대답하며 문서 제출을 회피하려 했다는 이야기가 『구칸쇼』에 전해진다.[2] 하지만 실제로는 요리미치의 장원도 문서를 제출했고, 규정에 어긋나는 장원은 몰수되기도 했다는 기록이 손자 모로미치의 일기 『고니조 모로미치기』에 남아있다.[3]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리미치는 자신의 핵심 장원이었던 뵤도인(平等院)령 9곳은 지켜냈다.

『고지단』에 따르면, 고산조 천황이 뵤도인령을 조사하기 위해 관리를 파견하려 하자, 요리미치는 직접 관리를 맞이할 준비를 했지만, 요리미치를 두려워한 관리들이 아무도 우지(宇治)로 가지 않았다고 한다.[4] 이는 요리미치가 표면적으로는 장원 정리령을 따르는 척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핵심 장원을 지켜냈음을 보여준다.

2. 4. 말년과 죽음

지랴쿠 4년(1068년) 3월, 고레이제이 천황이 위독해지자, 요리미치는 같은 달 23일에 치사 상소를 올렸고, 4월 16일에 칙허를 받았다. 4월 19일 천황이 사망하자, 요리미치는 우지에 은거했다.[1]

고산조 천황이 즉위하면서, 후지와라 씨와 직접적인 혈연 관계가 없는 천황이 35세의 장년으로 즉위하여 적극적으로 국가 재정 개혁에 착수하고 엔큐의 장원 정리령을 내렸다. 후지와라 씨를 비롯한 권문(権門)의 장원도 심사 대상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요리미치는 표면적으로는 정리령을 받아들였지만, 천황에게 자신의 장원 핵심인 뵤도인령을 인정받았다.

엔큐 4년(1072년) 4월, 요리미치는 출가했다. 같은 해 12월, 고산조 천황은 재위 4년 만에 황태자 사다히토 친왕에게 양위했다(시라카와 천황). 고산조 상황은 신제를 후견하며 인세이(院政)를 의도했다고도 하지만, 불과 반년 만인 이듬해 5월에 사망했다. 요리미치는 동궁 시절부터 고산조와 대립했지만, 현명한 군주의 요절을 슬퍼했다고 한다.

엔큐 6년(1074년), 요리미치는 83세로 사망했다. 셋칸 정치의 전성기를 함께 한 누나 조토몬인 쇼시, 동생 노리미치도 같은 해 또는 이듬해에 걸쳐 잇따라 사망하면서, 시라카와 천황이 양위한 후 시작된 인세이 시대로 옮겨갔다.

3. 가족 관계

후지와라노 미치나가를 아버지로, 미나모토노 마사노부의 딸 미나모토노 린시를 어머니로 하여 태어났다. 정실은 구헤이 친왕의 장녀 류키 여왕이다. 요리미치는 여러 명의 부인을 두었지만, 자녀를 많이 얻지는 못했다.[7][8][9][10]

3. 1. 정실과 측실

부인관계자녀
류키 여왕구헤이 친왕의 장녀(양녀) 후지와라노 겐시 (1016-1039) - 아쓰야스 친왕의 장녀, 고스자쿠 천황의 중궁
미나모토노 노리사다의 딸무라카미 천황의 손녀[7]후지와라노 미치후사 (1024-1044)
후지와라노 기시후지와라노 요리나리의 딸[9]
후지와라노 나가요리의 넷째 딸[8]후지와라노 쇼시의 뇨보(女房)없음


3. 2. 양자

정실: 류키 여왕 - 구헤이 친왕의 장녀

  • 양녀: 후지와라노 겐시 (1016-1039) - 아쓰야스 친왕의 장녀, 고스자쿠 천황의 중궁
  • 처: 후지와라노 나가요리의 넷째 딸 - 후지와라노 쇼시의 뇨보(女房)
  • 처: 쓰이노 키미 - 미나모토노 노리사다의 딸
  • * 장남: 후지와라노 미치후사 (1025-1044)
  • 처: 후지와라노 기시 - 후지와라노 요리나리의 딸
  • * 차남: 다치바나노 도시쓰나 (1028-1094) - 다치바나노 도시에의 양자
  • * 삼남: 가쿠엔 (1031-1098) - 덴다이 자슈 제34대, 호쇼지 초대 벳토
  • * 사남: 후지와라노 사다쓰나 (1032-1092) - 후지와라노 쓰네이에의 양자
  • * 오남: 후지와라노 다다쓰나 (?-1084) - 후지와라노 노리에의 양자
  • * 장녀: 후지와라노 칸시 (1036-1127) - 고레이제이 천황황후
  • * 육남: 후지와라노 모로자네 (1042-1101)
  • * 차녀: 미나모토노 쓰네나가의 아내 (?-1055)[10]


그 외, 정실 류키의 친동생 미나모토노 모로후사를 양자 또는 유자(猶子)로 삼았고, 후에 그의 아들인 미나모토노 도시 பகை・닌가쿠 형제도 양자로 삼았다. 동생 후지와라노 노리미치의 아들인 노리에를 양자로 삼았고, 자신의 친아들인 다다쓰나를 노리에의 양자로 삼았다. 모로후사와 노리에는 실제로 요리미치의 밑에서 길러졌다. 더 나아가, 동생 후지와라노 요리무네의 아들인 도시이에와 미나모토노 도시카타의 아들인 아키모토를 각각의 원복 때 양자로 삼았다. 또한, 『쇼유키』등에 따르면 여동생 키시를 양녀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그녀가 도궁 아쓰나가 친왕에게 들어갈 때 아버지 미치나가가 이미 출가한 것을 꺼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4. 평가

요리미치는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아들로, 후지와라 섭관정치의 전성기를 이끈 인물이지만, 동시에 섭관정치의 쇠퇴를 막지 못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시대는 귀족 정치의 한계와 무사 계급의 발흥을 보여주는 과도기였다.

요리미치는 아버지 미치나가의 후광에 힘입어 26세라는 젊은 나이에 섭정이 되었고, 이후 50년 가까이 관백을 맡으며 권력을 누렸다. 그러나 고산조 천황이 즉위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고산조 천황은 후지와라 씨와 혈연관계가 없었고, 엔큐의 장원 정리령을 내려 섭관가의 장원을 정리하려 했다. 요리미치는 이에 반발했지만, 결국 자신의 장원도 정리 대상이 되었다.[1]

요리미치는 장원 정리령에 착수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권문 옹호책으로 끝났다.[2] 이는 요리미치의 정치적 역량 부족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받는다. 그는 권문세가의 이익을 옹호하고, 율령 체제의 붕괴를 가속화하여 결국 무사 정권의 등장을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러나 요리미치는 와카에 능통하고 가합을 개최하거나 가집 편찬에 힘쓰는 등 문화적으로 지도적인 지위에 있었다.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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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 뵤도인 건립

1052년 3월 28일, 요리미치는 아버지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별장이었던 우지전(宇治殿)을 뵤도인(平等院)으로 개축하고, 뵤도인 봉황당(鳳凰堂)을 건립했다.[6] 이는 당시 귀족 문화의 화려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5. 2. 관련 작품


  • 1957년 닛카츠 영화 달밤의 젊은 무사에서 시미즈 마사오가 후지와라노 요리미치를 연기했다.
  • 1993년 7월부터 1994년 3월까지 방영된 NHK 대하드라마 불타오르다에서는 모리츠카 빈이 후지와라노 요리미치를 연기했다.
  • 2024년 NHK 대하드라마 빛나는 너에게에서는 고바야시 아츠히로, 미우라 키라, 오노 하루토, 와타나베 케이스케[11]가 후지와라노 요리미치를 연기했다.

참조

[1] 서적 春記 長暦 0002-12-07
[2] 서적 春記 長暦 0003-10-12
[3] 서적 江談抄
[4] 서적 土右記 0001-11-22
[5] 논문 壷切御剣之事 1991-06
[6] 서적 勅撰作者部類
[7] 서적 小右記 0004-11-17
[8] 서적 栄花物語
[9] 서적 栄花物語
[10] 서적 僧綱補任抄出 2007
[11] 웹사이트 【出演者発表 第7弾】紫式部や藤原道長を取り巻く個性豊かな人々 - 大河ドラマ「光る君へ」 https://www.nhk.jp/p[...] NHK 2024-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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